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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언저리 그 무엇

대한민국의 세계유산, 창덕궁

by 똘구토리 2024.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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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창덕궁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유적지로, 그들의 진정성과 완전성을 통해 우리에게 고대의 빛나는 유산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세계유산은 문화유산, 자연유산,  복합유산으로 분류됩니다. 이중 문화유산은 역사적, 과학적, 예술적 측면에서 세계적 가치를 지니는 건축물, 고고학적 및 심미적, 민족학적, 인류학적 측면에서 세계적 가치를 지니는 유적지 등을 포함합니다.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건축물, 성곽, 탑 등을 중심으로 합니다. 문화유산의 지정은 국제기념물유적협회(ICOMOS)와 국제 문화유산보존 로마센터(ICCROM)의 지원을 받습니다. 반면, 자연유산의 경우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류 체계를 통해 우리는 세계의 문화와 자연의 보물을 보호하고 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창덕궁(昌德宮)은 서울 북악산 왼쪽 봉우리인 응봉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조선 시대의 궁궐로 동쪽으로는 창경궁과 맞닿아 있습니다.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고해서 조선 시대에는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이라고 불렸습니다. 창덕궁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고궁으로, 특히 창덕궁 후원은 유일한 궁궐 후원이라는 점과 우리나라의 정원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습니다. 1997년에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창덕궁은 고려 시대 궁궐의 전통을 이어받았고, 개성의 송악산의 만월대처럼 자연 지형에 맞추어 산자락에 지어졌습니다. 보통 궁궐은 인위적으로 존엄성과 권위를 드러내도록 건축되지만 창덕궁은 이러한 방식이 아니라 북악산 줄기인 응봉의 산자락 생긴 모양에 맞추어 적절하게 궁궐의 기능을 분배하였습니다.

창덕궁은 태종 5년(1405년)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조선의 궁궐입니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개경에 있던 고려 궁궐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라 조선을 건국한 뒤, 재위 3년(1394년)에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이듬해에 조선의 법궁으로 경복궁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건국 직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왕자와 공신 세력 사이의 갈등으로 왕자의 난이 두 차례 일어나면서 경복궁의 지위는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이방원이 옹립한 정종은 권력 투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재위 2년(1400년)에 한양의 지세가 좋지 않다며 도읍을 다시 개경으로 옮겼습니다. 그 뒤 정종에게서 양위받은 태종은 재위 5년(1405년)에 다시 한양으로 돌아오면서, 정궁인 경복궁을 비워두고 경복궁 동쪽 향고동에 궁궐을 새로 지은 후 창덕궁'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1408년 태조는 창덕궁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태종 11년(1411년)에 진선문과 금천교, 이듬해에 돈화문에 이어 여러 전각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창덕궁은 점차 궁궐의 모습을 갖추어갔습니다.

창덕궁은 500여 년의 조선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왕이 거처한 궁궐이었습니다. 조선의 법궁은 공식적으로 경복궁이었지만, 조선 초기 여러 왕들이 경복궁을 기피하는 연유로 창덕궁이 그 자리를 대신할 때가 많았습니다. 특히 태종은 왕위를 얻기 위해 이복동생을 죽인 곳인데다가 자신의 정적이었던 정도전이 주도하여 만든 경복궁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습니다.

창덕궁의 위상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선조 25년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울에 있던 모든 궁궐이 불타버렸습니다. 선조 38년(1605년)부터 재건 준비를 시작하여 광해군 원년(1609년) 10월에 인정전 등 주요 전각이 거의 복구되었으며, 이때 공사가 완벽하지는 않았는지 이듬해 2월부터 다시 공사가 진행되어 9월에 완료되었습니다. 이후 역대 왕들은 창덕궁에서 주로 정무를 보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궁궐의 중요성이 부각되었습니다.

인조 반정을 겪으면서 창덕궁 대부분이 파괴되었지만 조선 인조 25년 1647년에 재건하게 됩니다. 이때 인조는 후원에 여러 정자와 연못을 조성하였습니다. 숙종 30년(1704년) 12월에는 대보단이 조성되었으며, 정조는 인정전에 품계석을 세우고 후원에 부용지를 중심으로 부용정, 주합루, 서향각을 세우고, 국내외 서적 보관을 목적으로 열고관, 개유와, 서고를 지었습니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는 의두합과 연경당을 지어 오늘날의 후원 모습을 마무리하였으며, 헌종은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를 건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조선 말기에는 서구의 문물을 도입하면서 창덕궁에서도 서양식의 전등이나 차고가 설치되기도 했습니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7년에는 순종이 즉위 후 이곳에 거처하면서 황궁이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돈화문 앞에 도로가 생기면서 창덕궁과 종묘가 갈라졌으며, 주요 전각 외의 여러 건물 또한 대부분 헐리게 되는 등 궁궐이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하지만 1912년부터는 창덕궁의 후원과 아울러 인정전(仁政殿) 등의 중심부와 낙선재(樂善齋) 등이 창경궁과 함께 일반에 공개되었습니다. 1917년에는 대조전과 희정당 같은 핵심 전각이 파괴되었으며, 이 곳을 재건하기 위하여 1918년에 조선총독부와 이왕직에서는 경복궁 교태전, 강녕전과 그 앞의 행각을 헐어다 창덕궁으로 옮겨와 개조하였습니다. 1921년에 일제는 대보단을 없애고 그 자리에 선원전을 지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창덕궁은 한동안 그대로 방치되었으며, 주변에는 민가와 학교, 대형 건물이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1997년에는 조형미와 주변환경과의 조화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창덕궁의 문화유산 등재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기준(ⅱ) : 일정한 시기 또는 세계의 일정한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기념비적인 예술, 도시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의 발전에 있어 인류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보여주어야 한다.
창덕궁은 한국의 건축, 정원 디자인, 조경 계획 및 관련 예술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궁궐이다.

기준(ⅲ) : 현존하거나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유일한 또는 적어도 독보적인 증거여야 한다.
창덕궁의 건축과 경관은 전통적인 풍수 원리와 유교의 모범을 보여준다. 궁궐 배치는 풍수에 기초를 두었고, 건물은 기능적·상징적으로 조선왕조의 독특한 세계관을 함께 표현하는 유교 사상에 따라 배치되었다.

기준(iv) :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단계를 증명하는 건물 유형,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혹은 경관의 탁월한 사례여야 한다.
창덕궁은 동아시아 궁궐 건축과 정원 디자인의 뛰어난 사례로 건물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고, 지형에 적응하면서 자생 식물 분포지역을 유지하는 방식이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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